유난무브먼트는 ‘좋은 어른을 꿈꾸는 유난스러운 사람들 1천여명이 모인다면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실험이다. 두 번의 사전 타운홀을 거친 뒤 ‘각자도생은 우리의 시대정신일 수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세상에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비교적 짧은 시간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원을 받으며 성장해왔다. 우리가 지난 1년 반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유난무브먼트가 정의하는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좋은 어른을 말하는데 하필 ‘정치’와 ‘민주주의’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특히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선 비정치적인 태도가 무엇보다도 미덕처럼 여겨지는데 굳이 이런 접근이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과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확인한 것은 분명하다.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선언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어째서? 즉시 반문하고 싶어질 수 있다. ‘정치’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떠올려지는, 경직된 제도 속에서 소모적인 싸움만 벌이는 일부의 모습이라던가 지지부진하게만 느껴지는 시스템이 어떻게 우리가 꿈꾸는 좋은 어른과 연계될 수 있는지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전면에, 정확하게 배치하고 싶었다. 우리가 그동안 빼앗겼던, 또는 어쩌면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보지도 못했던 언어를.
유난무브먼트가 좋은 사람이 아닌 좋은 ‘어른’을 꿈꾸는 이들을 호명해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단어는 그 자체로 공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어른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본 ‘어른’이라는 단어에는 관계와 책임, 그리고 사랑이 담겨있다. 하나의 공동체나 사회에서 위치하며, 마땅히 품어야 할 주변과 세상이 있는 존재. 그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된 이들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불러왔다. 누군가 개인으로서는 무난한 성격과 태도를 지녔더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저 자신의 안녕과 평안만을 바란다거나, 타인의 상처와 고통과 상실이 내 일은 아니기에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를 선뜻 좋은 어른으로 호명할 수 있을까. 그 간극이 우리가 주목한 ‘어른’의 위치성과 역할을 드러낸다.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은 그 역할을 기꺼이 수행해보겠다는 선언이다. 사실은 다 외면하고 살아도 별 문제 없다고, 피곤한 세상 문제에 신경 그만 쓰고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고, 저 사람의 심장이 찢기는 일보다 내 손 끝의 상처가 더 아픈 게 원래 당연한 거라고 속삭이는 세상에 무난하게 순응하지만은 않겠다는 선언이다.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큼이나 타인과 함께 잘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괴로워도 볼 것이며, 그럼에도 더 나은 미래는 가능하다는 믿음을 꼿꼿하게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어쩌면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선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한 달간 우리는 이 유난스러운 선언을 다시 우리의 감각에 맞는 새롭고 풍부한 언어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근거있는 낙관과 기대감으로 전환시켜나갈 동료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 왔다.
지금 보내는 마지막 초대가 마음 한 켠에 닿았다면, 부디 오늘이 지나기 전에 꼭 등장해주기를!